이광수, 한국 그리고 <흙>
글 그레고리 C. 이브츠
이광수가 명작 <흙>을 출판했던 1932년과 1933년과 마찬가지로 오늘 날 아시아의 혼을 위한 격렬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근대화를 향한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인가? 사회는 어떻게 세계화된 도시와 보수적인 심장지대와 조화를 이룰 것인가? 근대화를 위해서는 서구화가 반드시 필요한가? 어째서 민족주의가 식민주의에 대한 대응인가? 무엇보다도, 유교사상과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는가? 이광수(1892-1950, 李光洙)는 주인공 허숭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다룬다. 두 여자 사이에서의 갈등, 두 지역 사이에서의 갈등, 두 세계 사이에서의 갈등, 1930년대 한국에서 겪는 삶을 위한 투쟁. 이 투쟁은 오늘 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허숭은 부패한 세상에 내던져진 정직한 인물이다. 한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일본 식민주의 체제에 흡수되어 도쿄에서 훈련을 받고 야마토 민족의 이름으로 제국을 통치하고 관리하고자 서울로 되돌아온다. 이 협력자들은 대부분 공무원으로 한국 전통에 먹칠을 하고 여자들을 성희롱하며 과음을 하고 아내나 애인에게 폭행을 가하면서도 대체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들 틈에 있는 허숭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젊은 변호사이자 몽상가이며 근대화된 전통적인 조선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숭고한 인품, 진지한 사고, 순진한 행동.
허숭은 그의 후원자인 참판의 맏아들이 죽자 부유하고 미모가 뛰어난 도시처녀인 참판의 딸과의 혼담이 거론된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시골에 두고 온 그의 첫사랑이 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원에 대한 꿈을 버리고 참판의 딸과 결혼한다. 이 젊은 변호사는 이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허숭은 궁극적인 출세를 한 것이다. 서울로 상경해서 너그러운 후원자를 위해 일하고 그의 딸과 결혼해서 변호사가 되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이를 모두 버린다. 그는 시골로 돌아간다. 그는 왜 출세를 거부했을까? 허상이기 때문이다. 출세에 대한 꿈은 환영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부자 후원자를 가진 가난한 시골 출신인 그는 결국 서울에 굴복하고, 상류층 아내에게 굴복하고, 무정하고 무지한 사회에 굴복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서울은 썩어있다. 심지어 후원자인 참판 댁도 썩어있다. 허숭의 적수인 김갑진도 참판 댁의 일을 돌보고 있다. 그는 한국문학을 무시하고 – 이는 한국문학의 대가가 만들어낸 인물의 행동이라고 보기 놀랍다 –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서울에서 시골까지 허숭이 보내는 모든 정직하고 민족주의적인 일상에서 그를 괴롭힌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허숭의 또 다른 적수로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의사 이건영이 있다. 그는 가장 힘든 대공황 시절, 최악의 식민지 착취로 인해 빚더미에 시달리고 있는 무지한 농민들을 돕고자 하는 허숭을 가로막는다.
허숭의 정직함은 지식인 협력자들이 있는 서울과 마찰을 빚는다. 그는 추상적인 “진실성”과 “우수성”을 추구하지만 이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는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매우 가까운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소설 후반부에 보다 나은 삶과 첫사랑을 되찾기 위해 “흙”으로 돌아간다. 그는 옛 한국, 근대화와 혼란이 닿지 않은 전설과 같은 한국을 그리워한다. 놀라울 정도로 숭고한, 그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실재인 그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근대화, 즉 기차, 식민주의, 세계화는 숭고한 사람을 파멸시킨다. 정부는 멀찍이 관망하고 있을 뿐, 민중을 위한 유교적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이광수가 오늘날의 한국을 표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숭은 마을로 돌아오지만 그를 맞이하는 것은 그의 고매한 목적에 대해 무지한 농민들의 의심뿐이다. 부도덕, 강간, 유기가 난무한다. 그는 의심 많은 고집불통의 농민들과 그의 도시적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여인, 그의 첫사랑이 있는 시골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소설은 결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의 획기적인 결말로 끝나는데 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떠오르게 한다.
문학을 통한 해방
동시대 작가였던 헤밍웨이와 마찬가지로 이광수의 문체는 꾸밈이 적은 단문이다. 그의 인물들은 일차원적으로 단순해서 거의 만화 인물이나 다름 없으며, 모두 전반부에 등장한다. 조셉 캠벨이 분석하는 신화인 듯, 가장 기본적인 전형을 찾기가 쉽다. 검은 옷의 나쁜 사람과 하얀 옷의 착한 사람이 있다. 고약한 여자와 고결한 여자가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 특별하고 순진무구한 주인공인 허숭은 그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지상낙원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흙>은 1932년 4월 12일부터 1933년 7월 10일까지 “아시아의 빛”(Lux ex Oriente)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일간지 ≪동아일보≫에 272편으로 나뉘어 연재되었다. 영문 번역서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소설과 단편소설을 모은 “한국문학 라이브러리” (Library of Korean Literature)의 일환으로 발행한 것이 유일하다. 호러스 J. 호지스와 황선애 부부가 공동 번역을 했으며, 출판사에서 연재 당시의 형태를 보존하여 272편이 각각 2~3장으로 4부로 나뉘어져 있다. 이광수는 이런 형태로 잡지나 일간지에 연재를 많이 한 도스토예프스키, 디킨스, 뒤마와 같은 대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세주 이광수, 민중에게 문학을 전하다
이광수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했으며 그가 현대에 남긴 업적은 괄목할 만하다.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내면적 사고를 이해할 수 있다. 이광수는 1892년 3월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흙>이 출판되기 20년 전인 1909년, 17세의 나이에 도쿄에 있는 기독교 재단의 메이지학원에서 학업을 잇고 있었다. 많은 동성애적인 요소를 반영하기도 했던 그의 일기를 보면 그가 미국과 일본 교수들에 대해 가진 반감을 엿볼 수 있다. 학생들은, 특히 한국 학생들은 그 시절의 적나라한 인종차별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메이지학원의 일본 학생들은 대놓고 한국 학생들을 무시했는데 이는 일본의 섬에서나 만주의 벌판에서나 고향인 한반도에서조차 한국 혈통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다 겪는 인종차별이었다.
물론 인종차별주의는 민족주의의 이면에 불과하다. 일본의 국위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상승하고 있을 때 이 새로운 제국의 시민들은 공식적인 “민족”을 규정 받았다. 최상급은 “일본인”이었다. 그 밑으로 “한국인”과 “만주인/청인(淸人)”이 있었다. 제일 밑에는 “한인(漢人,한족 중국인)”이 있었다. “민족”을 명시한 국민증은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다. 이광수는 이런 인종차별주의와 차별대우를 학업을 잇는 동안, 평생 동안 직접 피부로 느끼며 살았다.
1850년대와 1870년대에 걸쳤던 미국의 식민주의와 착취에 대한 일본의 강력한 대응은 바로 이것이었다: 민족주의. 일본 자체의 식민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에 빠져들었다. 이는 1919년 3.1 운동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났으나 이 보다 10년 전에 이미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1909년 10월에 놀랄만한 유혈사태가 뉴스에 보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伊藤 博文), 일본의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을 네 번에 걸쳐 역임하고, 대한제국의 통감(統監)이었으며,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자 메이지 헌법 초안의 공동작성자이며, 일본의 민족우월주의를 대표하고 한때 일본의 1,000엔 지폐에 새겨져 있었고 억압받는 한국의 표상이었던 그가 만주의 한 기차역에서 총 세발에 저격되었다. 안중근 (安重根)이 자신의 의지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행동선전(行動宣傳)의 결과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은 이미 분노에 차서 아시아를 덥석 삼켜 들려고 하는 일본사회에 비분강개한 젊은 이광수에게 그의 “착실한” 일기를 버리고 그의 “얌전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버리게끔 하였다. 그는 당시 17세의 나이에 한국 민족주의자로 거듭났다. 그가 “악한 일기”라 지칭했던, 오늘날 중대한 문서자료로 남은 그의 다음 일기에서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가장 확실하고 솔직한 방법으로, 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거나 내게 깊은 인상을 주는 이 여러가지 일들은…” 그는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1910년에 이광수는 문학을 통해서 한국사람들을 계몽하려는 그의 뜻을 평론 <문학의 가치>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봉건제도의 굴레를 벗고 “한국의 악취”인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풍습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다. 그는 한국사회가 세계 무대에 당당하게 서기를 바랐다.
그의 또 다른 평론인 <독서를 권함>(1915)에서는 “오인(吾人)이 원시적 빈궁하고 누추한 야만의 상태를 벗어버리고 풍부 • 고상 • 화려한 문명의 생활을 현출하여 조화옹(造化翁)의 경영(經營)에 놀라운 대교정(大校正)을 준 것은 실로 이 창고에 쌓아놓은 보물의 힘이로다”라고 말한다. 문학은 구원이다. 문학은 근대화다. 문학은 독립이다.
세계의 일부로서의 한국
지구 방방곡곡에서 – 아일랜드, 터키, 이집트, 이란, 인도, 중국 – 여러 국가들이 제국주의 권력에 의한, 제국주의 권력을 위한 세계와 타협해야만 했다. 허숭이 서울은 물론 시골에 돌아가서도 겪어야 했던 문제들과 같은 문제를 겪어야 했다. 민족주의는 항상 식민주의에 대한 대응이며, 이는 허숭의 부패하고 협력자적인 서울 정권에 대한 응수로 나타난 이상주의와 같은 것이다. 세계 1차대전이 종결된 1919년은 실로 기억할만한 중대한 해였다. 베이징의 5.4 운동, 아일랜드 독립 전쟁, 터키 독립 전쟁,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식민지 한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이 있었다. 이들 모두 식민주의, 근대화, 그리고 전쟁에 대응한 민족주의의 현상이었다.
이광수도 이에 동참했다. 1919년 2월 27세였던 그는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같은 해 4월에 3.1 운동 후 강경해진 경찰의 박해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여 다른 독립투사들과 함께 한국 임시정부를 세우는데 일조했다. 29세였던 1921년에는 식민지 통치 하에 있던 서울로 돌아온다.
이광수의 세계
1930년대 중반의 서울은 혼란스러웠다. 산업화와 세계화의 바람이 처음으로 나라를 강타하여 농경사회의 기반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한국의 심장까지 근대화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철도선, 전신, 제국주의 경찰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부채는 많았고 세금은 더 많았다. 청년들은 시골을 떠나 선양(瀋陽)이나 오사카(大阪)로 향하여 많은 돈을 벌거나 남만주철도회사에 더 많은 빚을 지기도 했다. 기차와 연락선이 제국의 모든 구석구석을 연결했다: 만주, 한국, 일본, 오키나와, 대만. 확실히, 1930년대의 한국은 적법한 취업비자, 자유여행, 구직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비해 더 연속되어 있었다. 한국은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조선사회가 세계화의 온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으나 그 온기는 식민주의와 착취의 악취에 찌든 온기였다.
무자비한 식민지배체제와 차별주의적인 제국주의 정부는 식민지로부터 천연 자원과 인력을 착취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변화는 이 때문에 더욱 더 괴롭고, 분통 터지고, 트라우마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육군 대신 우가키 가즈시게 (1868-1956, 宇垣 一成)은 <흙>이 출판되었던 1931년에서 1936년까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 그의 냉혹한 제국주의 경찰들은 인종차별주의적이며 산업적인 철권 통치를 했다.
이광수는 1930년대에 <흙>이 출판되기 직전에 불교로 개종했다. 1937년 제국주의 경찰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39년 친일 행위로 돌아섰다. 1940년대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친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나 현대적인 시각으로 “친세계화” 혹은 “친근대화”란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1950년, 북한이 서울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다른 작가들과 함께 납북되었으며 그 이후에 소식이 끊겼다.
오늘날 이광수의 세계
근대화된 세계와 전통적인 마을 사이의 양분화된 투쟁은 이광수의 주인공인 허숭 뿐만 아니라 1994년 포린 어페어스 (Foreign Affairs) 지에 실린 논쟁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외교 및 국제관계 전문 잡지인 포린 어페어스가 전 싱가포르 수상인 리콴유 (1923-2015, 李光耀)의 인터뷰를 1994년 3/4월호에 게재했다. 그는 그의 답변에서 유교는 근대화나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서구 사회의 도덕적 붕괴는 현명한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동양에서는 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 한국이 일어섰다.
이광수의 발자취를 따라, 가상의 허숭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은 민주주의와 근대화를 위해 세계의 무대에 올라섰다.
김대중이 답문을 썼다.
김대중 (1924-2009, 金大中) 전 대통령은 동아일보의 이름에 걸맞게 동양에 빛을 비추었다. 김대중이 리콴유의 발언에 대한 답신을 썼다. 그의 기고문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4년전인 포린 어페어스지 11/12월호에 게재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고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공포스러운 경찰국가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교육의 강화와 정신적 가치에 대한 숭배,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술 양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중은 그의 기고문에서 전통적이고 엄격한 유교사상은 아시아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폭군, 독재자, 공산당이 그들의 무자비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유교를 언급한다는 것을, 그리고 동양인도 충분히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김대중은 허숭이 옳았다고 확실히 말하고 있었다. 유교사상과 민주주의 – 근대화와 과거 –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실이 약 83년 전에 쓰인 이광수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근대화, 일본 혹은 서구에 의해 형성된 세계 구조에 따른 동양의 대응, 그리고 유교사상과 한국 전통사회와 근대화간의 조화에 대한 가능성이 그것이다.
많은 면에서, 일제강점기의 협력자들이나 독재정권 정부관료들의 모습은 현대의 한국정부가 화이트칼라 공무원들에게 요구하는 모습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머리를 숙인 채 그저 열심히, 묵묵히 일하라. 세종시와 서울 시내에 동일하게 산재해 있는 현대 국가의 공무원들은 단순한 정부 메커니즘을 영구적으로 고착화할 뿐이다. 이들은 “진정한” 한국 사회의 어려움으로부터 고립되어 그들만의 공무원 버블 속으로 피신한다. 공무원으로서 편안함을 추구하며 통치 구조를 지탱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의 병폐를 잊고 지낼 수 있다. 한국은 항상 시민과 정부 사이의 “신뢰”에 대한 OECD 통계 조사에서 하위권에 머무른다. 다시 한번, 정부가 시민들에 대한 유교적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이광수의 주인공인 허숭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거대한 사회와 부딪친다. 서울에서는 협력자, 시골에서는 무지한 농민들이 그를 막아 선다. 김대중 또한 민족주의적 독재정권 밑에서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일본으로부터 전수받은 군사적인 사회구조를 개선할 의지도 없고 변화도 추구하지 않은 엄격한 사회와 부딪쳐야 했다. 오늘날, 김대중이 비췄던 빛은 위험할 정도로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광수는 그의 일기와 소설로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를 부른다. “문학을 통해 세상을 구하라!” 많은 대한민국 시민들이 <흙>을 다시 읽어봄으로써 현대 한국의 생활에서 재벌기업과 정부 공무원, 그리고 맨 밑에 빠져 소외되어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 협약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온라인 댓글에서 현대 한국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르고, 폭도 같은 사회 선배들이 난무하여 “개저씨들”이라 일컫고, 출산율은 떨어지고, 한국 청년들 사이에서 이민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사회 전반에 걸쳐 행복감이 최저치로 떨어지고, 개인 부채는 높고, 올바르지 못한 교육체계와 충격적으로 높은 자살률을 본다면, 이광수의 세계는 현대 한국의 모습 그대로다. 오늘날 숭고한 허숭이 살아있었다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의 지상낙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숭고한 조선 선비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리하여 아시아의 혼을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 한국이 현대세계에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수출에 이은 수출, 신기술을 뛰넘는 신기술 – 우리는 김대중과 이광수를 통해서 한국이 동양에 비추는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문학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 것이다.
Categories: Uncategorized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