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장편소설 (2009) 리뷰

이기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2009) 리뷰

2016년 1월 29일

글 그레고리 C. 이브츠

 

 

“저를 정육점 아저씨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세게 졸랐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에요.”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누가 누구의 목을 졸랐나? 누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사과하고 있는가? 누구 사이에 이제 다 괜찮아질 것이란 말인가? 비정상인 에셔의 세계에서 정신 이상은 정상인에게 유일한 피난처다.

 

날개 달린 붉은 도마뱀처럼 난데없이 휙 날아들면서, 혹은 하얀 구속복을 입고 완충장치가 설치된 벽을 기어오르듯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 At Least We Can Apologize>(2009) 속 뒤틀린 세계는 독자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이 세계의 비정상성은 첫 페이지부터 두드러진다. 헌터 S. 톰슨(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글쓴이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곤조 저널리즘을 창시: 역주)이나 조지프 힐러(2차 세계대전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쓴 <캐치-22>의 저자: 역주)도 맥을 못 출 듯싶다. 이기호는 착즙기에 레몬을 짓이기듯 작품의 구성을 비틀고 결국 스토리의 일부는 예술, 일부는 이야기 그리고 일부는 초신성으로 발산된다.

 

먼저 소설의 배경을 살펴보자. 이기호 판 코크타운(찰스 디킨스 소설 <어려운 시절>의 배경인 영국의 가상 도시: 주)은 현대 한국 도시의 어두운 아스팔트 위에 펼쳐진다. 한국의 획일적인 임대 아파트 단지가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비정상적인 인간은 위로 뻗은 성냥갑 같은 시멘트 건물 안에 쥐들처럼 살고 있다. 건물 사이에는 세상이 밝은 곳이라는 인간의 어리석은 믿음에 대한 헌사로서 빨간색 빛 바랜 그네가 아파트 그림자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민들은 묵묵히 낙서된 엘리베이터를 느릿느릿 타고 오르내린다. 그리고 인생이 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되뇐다. 슈퍼 아주머니는 버릇처럼 말한다. “더러운 놈의 동네, 내가 빨리 가게를 빼든가 해야지 원!……내가 이번 달 안으로 뜬다, 떠.” 그녀는 소설 내내 그 자리에 있다.

 

이야기는 몇 달 전 도시 인근의 한 정신병원에서 시작된다. 등장 인물로 원장 선생님, 총무과장, 식당 아주머니, 남자 복지사 두 명이 있다. 이 중 키가 작은 쪽은 의사 가운을 입었고 키가 큰 쪽은 대머리 부분을 옆머리로 정성스레 덮고 있다. 종종 관청에서 공무원들이 나와 정신병원이 국가 지침을 지키는지 조사한다. 이 때는 환자들의 비닐 침대보가 면 침대보로 바뀐다.

 

그리고 환자들이 있다. 완곡하게 ‘원생’으로 불리는데 이 중 두 명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바로 시봉과 나, 시봉과 나, 시봉과 나다. 서술자는 진만이지만 그가 자기 이름을 호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독자들은 심지어 32쪽(번역본 기준)에 이르러서야 그의 이름을 알게 된다. 이 시설의 두 기둥은 언제나 ‘시봉과 나’다.

 

이렇듯 대략적으로 묘사된 정신병원에서 두 원생은 집단 구타를 통해 유대를 맺는다. 잇따른 매. 허리띠. 군홧발. 쇠파이프. 주먹. 전화번호부. 머리에는 삽. 아침. 낮. 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매를 맞는다. 이들은 웃고 사과한다. 그리고 다시 매를 맞는다. 그러다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가 등장한다.

 

소설 1장에서 정신병원은 스캔들에 휩싸여 폐쇄되고 우리의 ‘추장’과 ‘맥머피’는 세상으로 풀려난다. 둘은 시봉의 여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삼류 매춘부이며 게을러빠진 동거남이자 포주는 경마로 돈을 날리고 있다.

 

두 주인공은 고향을 향해 여정을 떠나는 오디세우스처럼 소설 초기에 정신병원을 떠난 후 일련의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사회로 나간다. 우선 둘은 시봉의 여동생 집까지 걸어가야만 한다. 시골 도로의 갓길을 따라 몇 시간이고 걸은 후 잠시 버스를 타기도 한다. 경마에 빠진 포주 남자친구는 둘을 데리고 나가서는 일자리를 찾으라고 한다. 둘은 남아 있을 알약을 수거하기 위해 폐쇄된 정신병원에 돌아가 벽을 넘는다. 그 곳에서 예전 원생이었던 실성한 아줌마를 만나고 비닐봉투 한 가득 알약을 구하고 원장선생님의 일기도 발견한다.

 

구직을 막 포기하려는 시점에 예전에 먹던 약 기운이 온 몸에 다시 퍼지자 둘은 자기들이 잘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한다. 바로 사과다. 둘은 구타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둘은 이를 소소한 사업거리로 만든다.

 

시봉 여동생의 아파트 건너편에는 고지식한 두 사람이 살고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에 광대가 등장한다면 이 작품의 광대는 바로 형과 아우처럼 지내는 과일 가게 주인과 정육점 주인이다. 우리의 주인공 정신병 환자들은 이들을 사과의 대상으로 정하고는 이아고처럼 두 사람에게 질투의 씨를 뿌린다. 둘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으며 사과가 사업으로 될 날을 기다린다. 작은 가게들을 착취하며 조용히 돈벌이 수단을 구축하는 폭력배들처럼 두 주인공도 그렇게 가만가만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프랑스 만화시리즈 <아스테릭스와 예언자>에서처럼 폭발이 일어난다. 싸움이 터진다. 이제 두 주인공의 사업은 번성한다. 그렇게 소설은 진행된다.

 

 

문학화 사회 논평

작가 이기호의 세계는 혼란스럽다. 현대 한국 사회 구조의 뒤틀리고 찢겨진 곳이 미래로 내던져지고 있으며, 명예로운 고결함으로 낭만화된 수 백 년 동안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세계화 시대를 대처하기에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단지 명예로운 행동의 요소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자선 사업을 실행하는 대기업 유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 기업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재력가가 소유한 다수의 기업이 사실상 자선사업을 시행하지 때문이다. 한편 사회에는 억압받는 비주류 층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도 많이 존재한다. 이들은 예외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이기호의 세계는 약 50년 간 식민 제국주의라는 칼날로 도려내지고 다시 한번 군부독재라는 칼날을 50여 년간 겪어내며 어떠한 명예스러운 행동도 제거된 세계다. 시봉과 나처럼 충격을 받은 채 21세기에 내던져진 한국의 상처는 봉합되지 않은 채 피를 철철 흘리고, 그 상처를 보듬으며 위안을 주는 이들은 바로 작가와 소설가, 시인이다.

 

한국에 살면서 사람들은 자주 정부의 미화된 거짓말과 불명료함이 주는 단조로움에 영향을 받는다. 국민은 정부의 뉴스레터와 기자회견에서 진부한 글을 읽고 국내 언론 보도는 너무 소심하고 길들여진 나머지 영향력 있는 제4계급으로 활동할 수 없다. 그 누구도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예의 없으니 말이다! 중국의 쇼핑객을 상대로 위안화를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부각시켜 번지르르하게 제작한 관광 홍보물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솔직히 꼭 <트루먼 쇼>의 촬영장에 있는 것 같다. 헛소리, 또 헛소리. 대부분의 사회와 정부는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만들어진 공적 메시지의 영역을 넘어서 진정 한국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고 싶다면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인위적 패스티시, 즉 안일한 공무원 조직의 요구에 따라 고안된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서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국 문학을 읽어야 한다. 한국 문학을 읽으면 이 나라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가온다. 한국 문학을 읽으면 이곳도 훨씬 멋진 공간이 된다. 싸이도 인정할 것이다.

 

이러한 현대 한국 문학의 기수로 꼽히는 작가 이기호. 그는 올해 44세로 현재 전라남도 광주에 거주한다. 흡사 귀뚜라미가 펜대를 잡은 듯 소설은 플래시백과 현재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영화 <펄프픽션>의 장면들처럼 독자는 소설의 조각조각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그 속도가 고르지 못하거나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적절한 수준으로 전개되며, 독자는 절대로 감을 잃지 않는다. 작가는 단문을 구사하고 각 장의 길이도 짧으며 심지어 일부 장은 한 페이지 남짓인 경우도 있다. 이 작품의 영역본은 한국문학번역원(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of Korea)이 진행하는 ‘한국문학총서(Library of Korean Literature)’ 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Christopher Dykas가 번역했다. 이기호는 누군가에게 당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사과하고 그 대가로 당신으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일을 소재로 비정상적 세계에서 정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해 나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하얀 구속복을 입은 채 천천히 완충장치가 설치된 벽을 기어오른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한 다음, 그다음 반드시 죄를 지었다. 고백한 내용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체벌

현대 서양 독자들에게 이기호 세계의 순전한 신체성, 즉 구타와 고함은 그 자체로 충격일 수 있다. 신체적 잔혹함은 해진 천을 스며드는 땀처럼 이기호의 문단 사이에 스며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독재군부의 군국주의를 겪은 한국 사회는 그 자체로 신체적 잔혹함을 정확하게 발전시킨 듯 하다. 이는 약 1997년 금융위기까지 이어졌고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경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19997년과 2002년이라는 두 번의 중대한 시점까지 신체적 잔혹함은 한국 사회 전반과 남녀 모두 에 팽배했고 이는 이기호의 비정상적이고 잔인한 세계에 잘 나타난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이념에 따라 남자들은 학교에서는 교련 훈련을 받고 그 후 공장에서 “부국강병”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여자들은 아들을 낳고 김치를 담그며 조용히 걷고 목소리를 낮춰야 했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2년 이상 의무 복무를 해야 했던 반면 여자들은 총은 잡아볼 필요 없이 가정에서 오로지 훌륭한 인물을 길러내야 했다. 딸은 반갑지 않은 짐일 뿐이었다.

 

신체적 잔혹함은 한국 사회에 오래 지속됐다. 2014년 월 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한 교사는 “수학 시간에 숙제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생 여덟 명에게 앉았다 일어서기 800회를 시켰다. 일부 학생은 수학 문제의 정답을 맞춘 후에 그만둘 수 있었지만 병원에 입원한 익명의 한 학생은 800회를 끝까지 마쳐야 했다.” 기사에 나왔듯이 학생 한 명은 병원에 입원했다.

 

따라서 체벌과 고함은 비록 사라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 한국인의 심리 전반에 잔류하며 이기호의 소설 <사과는 잘해요>에도 퍼져있다.

 

시봉과 나는 항상 맞는다. 플래시백이 등장할 때마다 두 주인공은 맞는다. 작가로서 이기호의 기이함은 꽤 분명히 드러나는데, 시봉과 나는 맞을 때 웃는다. 사과하기를 판매하는 두 주인공들은 신체적 벌을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보다, 일부 고문 장면에서보다 더 심하게 견뎌낸다. 이들은 웃고 사과한다.

 

이기호는 여러 장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맺는다. ”  구타와 사과가 전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 빛 그리고 혼자서기

이기호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에도 빛은 있다. 세상의 모든 잔재와 허튼 소리에도 주인공들은 순수한 마음과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다. 하지만 이를 보기 위해서 독자는 작품의 3읽어야 한다. 이 부분은 신선한 호흡으로 다가오다가 독자에게 충격을 주며 끝난다. 이기호는 결코 느슨해지는 법이 없다.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프먼이 그의 각본에서 언급했듯이 “마지막 장이 영화를 만든다. 결말에 모두를 놀래 키라. 그러면 히트작이 될 것이다. 작품에 결함이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결말에 모두를 놀래 키면 히트작이 될 수 있다. 결말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속여서는 안 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극이나 소설에서 가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힘이나 사건: 주)를 동원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등장인물은 반드시 변해야 하며, 그 변화는 등장 인물로부터 유래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그래, 이기호도 괜찮다. 괜찮을 따름이다.

 

 

뉴요커

작가 에드 박(Ed Park)은 뉴요커에서 이 작품과 더불어 이 작품의 시리즈인 한국문학총서 전반에 대해 기고했다. (“Sorry Not Sorry: Reading Dalkey Archive Press’s Library of Korean Literature,” The New Yorker, October 19, 2015). 사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어쩌면 “사과는 잘해요”보다 상황의 부조리함을 잘 포착한다는 점에서 더 적절한 영어 제목인지도 모르겠다. 에드 박은 계층과 사과에 대한 개념은 여러 관점에 비추어 현대 서구 사회에서 부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한국어와 일본어의 문법은 대화자에 따라, 특히 두 사람이 동등한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방이 당신보다 ‘높은’ 혹은 ‘낮은’ 지위에 있을 때 서로 다른 문법과 단어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점을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은 자명한 진실이다”고 선언하는 사회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과는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 독자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다. 정확히 한국어와 일본어에서는 두 인간이 진정으로 평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과에서 진정성을 제거하면 당신은 비정상의 세계에 남겨질 것이다. 이기호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깜깜한 밤

이기호의 디스토피아적 세계 그리고 한국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사과는 잘해요> 초반부에 등장하는 짧은 회상 장면으로 이 글을 맺는다.

 

시봉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볼일이 마려운 적이 있었거든.”

시봉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갓길에 잠깐 멈추고 도로 바로 아래에서 쪼그리고 볼일을 봤는데, 일어나니까 택시가 사라졌더라구.”

“저런, 널 버리고 갔구나.”

“아니. 트럭 아래로 그대로 들어가버렸더라구. 깜깜한 밤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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