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장편소설 (1992) 리뷰

박완서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리뷰

2016년 2월 26일

글 그레고리 C. 이브츠

 

두 팔을 펼쳐보자. 가능한 넓디 넓게. 그리고 풍성하고 부드러운 마음 속 저 깊은 곳으로 뛰어든다. 기억의 심연 가장 작은 편린까지 닿을 수 있도록 최대한 멀리 나아간다. 그 곳에는 당신 본연의 모습이 가만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마음 속 간직한 우물의 바닥에 도달하면 손을 뻗어 가장 깊숙한 모퉁이를 찾아보자. 거기에 기억과 허구의 아슬아슬한 경계가 놓여 있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는 기억과 상상력의 두 영역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이 작품은 평화로운 농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자상하고 정감 있는 회고로 시작한다. 이어서 주인공이 대도시에 적응하며 보낸 유년 시절과 십대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작품 약 3분의 2 분량에 이르면 이제껏 이어지던 따뜻한 이야기는 한낮의 햇빛에 사그라지는 아침안개처럼 걷히고 권위주의와 잔혹한 복수, 두려움에서 유래한 하찮디 하찮은 인간성이 드러난다. 완전한 두려움. 소설은 이야기로 유년 시절과 가족, 자연, 부모와 조부모, 꽃과 나무, 책, 숲과 산을 연결한다. 식민주의와 도시화, 독립과 내전을 씨실과 날실 삼아 서사를 직조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가 이어진다. 그러다 대한민국 초기 현대사, 권위주의가 휘두르는 채찍질로 끝난다. 공산당 수색이 벌어진 것이다. 빨갱이를 찾아야 한다. 1992년 작가 나이 61세, 이미 20여 년간 수많은 자전적 소설을 집필한 후 발표한 이 소설은 가히 작가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천의무봉 대가다움이 드러난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언젠가 누군가는 글쓰기가 쉽다고 말하며, 단지 타자기 앞에 앉아 손목을 긋고는 페이지에 피를 흘리면 된다고 했다. 독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작가의 기억과 허구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작가의 따뜻한 기억과 작가의 상상력 사이에서 헤엄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작가의 유려한 필치로 매우 쉽게 그려진다.

박완서는 감동적이면서 놀랍도록 간단하고 명확하며 그리고 솔직한 글쓰기로 재스민 향이 풍기는 바람에 보드라운 깃털이 떠다니듯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작품 속 아이는 시골 산천초목의 깨끗한 흙과 빗속에서 뛰놀고 실개천을 건너 뒷간에 간다. 유년의 기억이다. 1장에서 할아버지는 첫 동풍을 맞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엄마는 집안에 반란을 일으키며 오빠를 서울의 상업 학교로 보내고 뒷바라지를 하러 함께 떠난다.

이러한 아이의 세계 저편 어딘가에는 일본과 중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며 성장하는 다섯 살, 일곱 살, 아홉 살 아이에게 이 같은 시국은 멀고 먼 이야기다. 세계 정세의 발발 시기와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의 현실은 단지 현재의 우리 어른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당시 몸소 그 시대를 “살아낸” 아이에게 이런 사건들은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아이에게는 진달래꽃에 앉은 잠자리가 더 실감나는 실재였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늘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비가 더 실감나는 실재였다.

그렇다면 실재는 당신의 눈 앞에 놓인 것이다. 시골에서는 동식물과 시냇물, 언덕, 미신, 제사, 소나기, 친구,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숙모, 숙부, 사촌, 곤충, 계절이 실재다. 그러나 도시에서 직면하는 것은 체계화된 삶이다. 학교에서 장려하는 창씨개명, 새로운 친구 사귀기, 창씨 개명 여부에 따라 겪어야 하는 당혹감과 사회적 지위, 남양군도가 일본땅이 됐다고 거저 나눠주는 고무공, 그러나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배급 받게 된 고무신. 아이는 도시에서 이 모두를 직면한다. 나중에는 기본적인 설탕도 배급을 받아야 했고 학교에서는 일본 천황을 기리는 의식이 열린다. 하지만 또한 실제의 삶은 일요일에 도서관 방문하기, 인왕산 자락을 넘어 통학하기, 세 번째 동풍 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 가기로 계속 이어진다.

 

감정

“밝은 빛 대도시(The Bright Lights of the Big City)”는 어린 화자에게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작품 속 박완서는 침착하게 대처할 따름이다. 대부분의 십대 초반에게 그러하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지, 즉 우리가 인지하기에 타인이 나와 친구, 부모와 형제 자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엄마와 오빠는 늘 함께다. 어린 화자는 초가집과 나무 도리, 토담벽에서 벽돌과 아스팔트, 시멘트로의 변화를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이 때 엄마는 어린 화자가 꼭 붙들고 있는 굳건한 반석이다. 십대 초반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유년 시절 화자는 엄마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끌리는 양가적 감정을 가진다. 엄마는 그녀에게 기둥이다. 아이는 호롱불을 키던 삶에서 전깃불을 키는 삶으로 이동한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개울과 실개천을 떠나 매일 아침 물장수가 배달해주는 두 바가지의 물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 어디에나 함께한다.

유년시절 박완서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의 대부분은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이지만, 아이로서의 자부심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화자는 현재 지하철 3호선 독립문 근방 산꼭대기 마을에 있었던 서울의 첫 번째 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분명 새로운 환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어른이 돼가는 첫 단계를 수용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천 년을 내려온 것처럼 안정된 구도에 익숙해진 나의 심미안에 조악한 원색으로 처바른 반닫이는 너무도 생급스러웠다.” 우리는 이렇게 어른이 된다.

20세기 중반 서울을 배경으로 화자의 유년시절 후기와 십대 초반의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하며 나타난다. 아이는 어른이 되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십대 소녀일 뿐이다. 십대 후반에 이르러 또 다시 어른이 되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아이일 따름이다. 감정이 분출한다. 가족에게 느끼는 부끄러움과 당혹감부터 가족이기에 흐르는 사랑의 눈물까지 포괄하는 감정의 진폭. 화자와 그 가족이 시골의 평온함과 식민주의의 부동성, 1945년 8월 해방과 찾아온 동요, 약탈이 자행된 탐욕스런 시간들,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1950-1953) 속 혼란과 두려움을 겪으며 어린 화자는 이 모든 감정을 체험한다.

 

제국

화자가 서울에서 다녔던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분명히 제국의 일부다. 다른 국가와 지방, 민족, 식민지역에 직접 교통편이 연결됐던 도시 서울이 제국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다. 열차는 부산과 서울, 압록강변 신의주, 그리고 만주 남쪽의 봉천(현재 중국 랴오닝 성의 선양)까지 운행했다. 여러 면에서 1930년대와 40년대의 한국은 20세기의 한국과 비교해 주변 지역인 만주와 혼슈, 대만, 오키나와 물론 현재의 북한까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울의 기차역에서 화자는 새로운 삶을 찾아 봉천과 만주로 향하는 이주자들을 목격한다. 이들 여객은 이불 보따리를 지고 더 먼 제국의 변방으로 떠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린다.

4장에서 화자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작품에 등장한다. 아이들은 모두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하지만 학교 당국은 아이들에게 일본화 “되기” 방법을 가르쳤다. 무슨 의미이든지 최소한 제국의 신민이 되는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사회적 요소, 즉 인종과 성, 민족, 정체성이 포함되며 식민정부는 이 내용을 수업에 반영해 신민을 “만들어야” 했다. 실제로 제국주의의 충격적인 피상성은 약 100년이 지난 현재의 우리에게도 분명할 뿐 아니라 당시의 아이들에게도 뚜렷하다.

“한 달 가량을 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노래도 하고 유희도 하고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학교 시설물의 이름을 일본말로 익히는 연습을 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아이의 눈을 통해 보며, 어린 화자에게 이러한 경험은 순수하고 일종의 유희로 비쳐진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우리는 제국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읽는다. 마치 오지만디아스가 최후를 알면서 자신의 동상을 짓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 같다.

전반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관행을 보면 시스템에 내재한 인종차별과 심리적 억압, 개인적 폭력이 관찰된다. 화자의 국민학교 등교 첫날부터 우리는 일본 문화와 교육, 사회, 제국주의 정책, 직업 전략을 목격한다. 일제시대 서울의 국민학교는 체벌을 제도화했다. 화자는 당시의 체벌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선생님은 손끝 하나 까딱 안하고 우리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건 짝끼리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상대방의 뺨을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때리게 하는 방법이었다……내가 때리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더 아프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길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억울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세게 때리고 싶어진다.” 이를 제국주의 일본의 영토였던 전 지역에 적용해 아이들이 반복해서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장제스 총통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대항해 투쟁하면서 직면했던 비인간적 폭력과 치열한 저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체제에는 폭력이 내재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1942~43년 겨울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서울 주민들의 삶은 더 가혹해졌다. 하지만 황폐화된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한국 혹은 최소한 서울은 제국주의와 제2차세계대전을 꽤 잘 견뎌낸 듯 보인다. 일본 제국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그 겨울 화자는 국민학교에서 마지막 학년을 보낸다. 여고에 진학한 첫 해인 1944년 3월, 일본제국은 무너지고 있었고 이 점을 제외하고 화자의 삶은 견고했다.

8장 도입부의 배경인 1945년 봄, 경성에 소개령이 내린다. 떠난 사람도 있고 남은 사람도 있다. 화자의 가족은 개성으로 돌아간다. 얼음 도매상을 운영하던 숙부는 암시장에서 뛰어들었다. 식량이 귀했다. 순사가 식량을 공출해갔다. 시골에서 서울로 몰래 쌀을 운반해야 했다. 작품 속 박완서는 고녀 2학년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어린아이는 이제 십대 소녀가 되었다.

1945년 8월을 앞두고 한 올의 실이 발단이 되어 스웨터 전체가 풀려버리듯 와해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이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씨실이 풀리고 날실이 풀린다.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필연적으로 일본은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물러갔다.

1945년 말, 화자의 관심은 시대의 불안과 엄마에서 식량 배급과 미군, 소련군, 대학입학시험으로 변한다. 화자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농바위고개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미지의 세계에 덮어놓고 이끌리면서 한편 뒷걸음질치고 싶었다.” 우리의 어린 주인공은 떨어질 각오를 하고 벼랑 끝에 서 있다.

 

한국전쟁

하지만 한국을 초토화시킨 것은 일본의 철수가 아니었다. 한국은 미군과 소련의 군정 아래 몇 년간 더 혼돈의 시기를 버텼고, 정치적 당파와 시민 조직이 도시를 중심으로 성쇠를 반복했다. 당시에는 화자와 가족이 도시민들에게 중요한 쌀을 구하기 위해서 개성과 서울을 오갈 수 있었다. 개성은 38선 바로 이남이었지만 서울을 기준으로 하면 북쪽으로, 처음에는 미군이 주둔하다 철수하고 소련군이 주둔했다. 두 현상 모두 1945~48년 동안에는 우연한 현상으로 보였다. 민간인들은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지만 기차는 늘 정원 초과에 드문드문 다녔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중요할뿐더러 소설에서도 제일 중요한 사건은 좌익 대 민족주의, 공산주의 대 극우, 급진 대 급진이 대립하며 곧 발발할 동족간의 심한 갈등이었다. 식민주의의 억압 속에 오랜 기간 억눌려있던 한국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여러 형태는 식민 지배가 끝나자 사회를 분열시켰다. 1945~50년간 동족간 갈등은 내전의 기류를 형성했고 1950~1953년, 마오쩌둥의 최종 승리에서부터 스탈린의 사망까지 전쟁으로 표출됐다.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에 따르면 6.25 전쟁은 일본에 기반한 미군과 승리를 거둔지 얼마 안된 마오쩌둥 공산당의 지역 전쟁으로 포장되고, 다시 한번 미국과 소련 간 세계 냉전으로 포장된 한국의 내전이다. 이 전쟁은 화자의 가족을 무참하게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치세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북에서 남으로 다시 남에서 북으로

1950년 6월 28일 전쟁 초 서울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인민군에 점령된다. 그리고 9월 25일에는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다. 한 차례의 점령과 수복을 겪은 후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당시를 화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살아남은 자는 제각기 구사일생이나 간발의 차이를 안 거친 이가 없었으니, 천명이 아닌 이 또한 없었다. 누구나 한번 사선을 넘고 나면 담대해지고 뭔가 보람 있는 일에 몸바치고 싶은 의욕이 충만해지는 법이다. 복수의 정열이 그들을 살기충천하게 했다. 게다가 아직도 전쟁 중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돼 있는 전쟁을 동족끼리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적은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른 이민족이 아니라 그냥 공산당이었다……그러나 애국은 곧 반공이었다. 애국과 반공은 손바닥의 앞뒤처럼 따로 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하며 다시 한번 세상이 바뀐다.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으로부터 한국전쟁에 군대를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특히 미군이 너무 가까이 진격해있었기 때문이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하며 1954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한번 함락된다. 하지만 이번에 미군과 국군은 서울을 잠시만 떠났다가 마침내 1951년 3월 14일 미8군은 중공군과 인민군을 서울에서 영원히 몰아낸다.

이는 불과 9개월 만에 서울의 세상이 네 차례나 바뀐 것을 의미한다. 전쟁 전 1만2000명에 달했던 인구는 20만 명으로 감소한다. 식량 부족과 혼돈이 일어났다. 배신과 죽음이 발생했다. 이웃이 이웃을 고발했다. 작품 속 박완서는 태어난 두 조카와 부상당한 오빠를 보살피며 엄마와 올케를 도우며 이 모든 일을 겪었다.

그러나 인민군과 중공군 못지 않게 국군은 마지막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 훨씬 악랄했던 듯 하다. 육안으로는 “인민군”과 “공산당원”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적색 공포에 사로잡혔고 새로 권력을 회복한 남한 사람들은 특히나 동네에서 빨갱이를 몰아내는 데 열성적이었다.

화자는 서울을 두고 달아났던, 특히 남한 정부 관련자들에 대해 직접 보고 겪은 바를 서술한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을 그렇게도 잘 참작해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남한에게 북한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친일파는 괜찮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약 1920~1940년에 태어나 현재 70대 후반에서 90대 후반에 이르는 한국인들은 농촌에서 도시화를 목격한 산 증인이다. 소와 흙 길이 어우러진 동네에서 자란 이들은 이제 유리와 철근, 실리콘 칩을 사용하는 현 세대를 살고 있다. 작가 박완서는 이러한 세대의 중간쯤에 자리한다. 무당집 푸닥거리를 하던 시대에 태어나 현대 의학의 시대에 사망했다. 현대 남한의 단면을 살피면 시골과 전원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전반에 이러한 역사 의식과 인류 진보에 대한 자부심이 편재하며 이 둘은 현대 한국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얽혀있다.

서양의 관점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쳐 탄생한 현대의 한국을 보며, 내전 이후 오랜 기간 남한에 독재가 이뤄졌다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1948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며 혹은 적어도 미국의 암묵적인 용인 하에 한국은 독재 정치를 겪었다. 실제로 남한의 사람들은 독재를 몸소 경험했다. 무미건조한 역사 문헌을 읽는 것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서, 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대를 조망할 수 있다. 문학은 역사적 기록보다 현대 한국에 대해 더 잘 설명해준다.

 

작품 자체로서

한국어로 싱아의 학명은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만주와 한반도의 산에 흔히 자라던 식물이다. 사실 싱아는 산에서 꽃 피는 다양한 범위의 관목을 아우른다. 하지만 주눅들 필요는 없다. 싱아는 서양 독자에게 못지 않게 한국 독자에게도 낯설다.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가 이처럼 낯선 식물을 제목으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작가는 동떨어진 느낌, 통제력을 벗어난 기이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서울의 첫 번째 집이 있던 그 산꼭대기 동네에서 언덕을 올라 학교에 가면서, 성곽의 외부에서 성곽 내부에 있는 학교로 등교하면서 아이는 인왕산에 있는 풀과 나무와 새들을 살피곤 했다. 시골에서는 초목이 우거졌다. 하지만 서울을 둘러싼 메마른 언덕을 보며 화자는 묻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싱아가 한 포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 박완서는 1931년에 태어나 2011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는 1970년 40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등단했다. 하지만 박완서 작품 대부분의 기저는 바로 유년 시절이다. 등단하고 약 20년 후 출간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바로 작가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자화상이다.

1992년 출간된 이 작품은 한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할아버지 세대를 이해하려면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2009년 컬럼비아대학교 출판사가 유영난, 스티븐 엡스타인 번역으로 이 작품의 영역본을 출간하며 이 작품은 세계에도 소개됐다.

일본이 미군에 항복했을 때 작가는 불과 열 네 살이었다. 그리고 열아홉 살과 스물두 살에 걸쳐 한반도를 휩쓴 한국전쟁을 치렀다. 소설은 바로 이 전쟁에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어른이 돼 유년 시절을 회고하는 이 소설의 핵심은 다름아닌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기억, 이야기를 규정하는 벽의 깊은 곳을 향해 가는 여행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유년 시절 사진 속 당신은 분명 당신이 틀림없다. 당신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동일한 인물인가? 유년의 당신은 성장한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현재의 자아를 형성한 당신의 인생은 무엇인가?

박완서에게 이는 유년의 기억이다. 우리는 61세 할머니가 된, 90년대 유리와 철강으로 대변되는 산업화 시대를 살았던, 그리고 시골의 유년 시절에 대해 글을 쓴 박완서를 알고 있다. 박완서에게 현재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이다.

“……실제로 우리 고장 뒷간은 팥죽을 먹어도 좋을만큼 청결했다. 칸살도 서너 칸은 되게 넓었고, 어른이 일을 보는 데는 한 켜에 나무로 된 틀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서 보게 돼 있었다. 아이들이 똥을 누는 헛간 같은 흙바닥은 뒤쪽이 낮아서 똥이 자연히 낮은 데로 떨어지게 돼 있지만 깊지는 않았고, 그 낮은 곳은 아궁이의 재를 갖다 버리는 곳을 겸하고 있었다…….”

“뒷간에 갈 때는 동무들하고 떼로 몰려서 갔다. 소꿉장난을 하다가 한 아이가 술래잡기를 할래? 하면 우르르 따라 하듯이 누군가가 뒷간에 가자 하면 똥이 안 마려워도 다들 따라가서……”

“줄느란히 앉아서 똥을 누면서 하는 얘기는 왜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가히 환상적이었다. 옥수수 먹고 옥수수같이 생긴 똥을 누면서…….”

“갑순에 누렁이가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는데 누렁이는 한 마리도 없고 검둥이하고 흰둥이하고 흰 바탕에 검정 점이 박인 것밖에 없으니 참 이상하다는 따위 하찮은 얘기가 그 어둑시근하고 격리된 고장에선 호들갑스러운 탄성을 지르게도 하고, 옥시글옥시글 재미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간직하기로 선택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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