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廣場) (발표일: 1960.11, 『새벽』) 글 최인훈 (崔仁勳) (출생: 1936.4.13)

<광장> (廣場) (발표일: 1960.11, 『새벽』) 글 최인훈 (崔仁勳) (출생: 1936.4.13)

개인의 밀실과 광장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평

그레고리 C. 이브츠, 2016년 8월 9일

 

카뮈의 소설 <이방인>(1942)를 떠올려보자. 한 남자가 인생을 방황하며 관계와 장례식, 살인, 죽음을 통해 삶의 부조리와 실존주의에 대해 논한다.

 

다음으로 카프카의 소설 <심판>(1925)을 떠올려보자. 인간 존재의 덧없음, 일상을 지배하는 쳇바퀴, 이 모든 과정의 무의미함, 무미건조한 하루하루의 일들, 더 큰 계획에 어떠한 통제도 가할 수 없는 무력감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1967)는 어떠한가. 죽음에 대한 풍자적인 긴 대화, 풍자와 조롱으로 사회를 갈가리 찢어버리면서 공원 벤치에 앉아 악마에게 이야기하는 남자.

 

혹은 고골의 소설 <죽은 혼>(1842)까지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했던 작가가 살았던 사회의 오류와 실패. 타락한 정치인, 이상주의자의 거짓말, 조작된 시스템, 내가 사는 세계가 미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드는 회의.

 

앞서 언급한 소설 네 작품의 모든 요소가 최인훈의 <광장>(1960년 11월, 『새벽』)에서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가가 24세, 한국의 삶이 위태롭고, 혁명과 쿠데타가 서울의 거리를 휩쓸었을 당시 쓴 이 작품은 젊은 남성이 삶과 우주, 모든 것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하며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장한 게 아니구 할 수 없이 산 것이겠지요”  (p.65)

 

소설이라기보다 한 편의 논문에 가까운 작품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의 질문,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는 남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여자가 있다. 그는 북한 사람이다. 북한에도 여자가 있다. 그리고 그는 먼 해변을 향해 떠난다. 그 해변은 독자가 결국에는 깨닫게 되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번역에 대해서 언급할 점이 있다. 번역자는 작품의 제목을 영어로 “The Square(광장)”라고 옮겼다. 하지만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그리스식으로는 “The Agora(광장)” 로마식으로라면 “The Forum(광장)” 혹은 “The Plaza(광장)”도 괜찮을 것이다. 한국어로 원제목인 광장(廣場)은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 열린 공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뉘앙스—대화, 사람간의 상호관계, 나의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은 “square”보다 “agora”나 “forum” 같은 단어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개인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에 대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화가 42쪽(총 147쪽 중)에서 주인공 이명준과 정선생 간에 이뤄진다(필자는 앞으로 사용하는 “광장”이란 표현은 “square”대신 “agora”로 대체한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거다……. 삶이란, 잊어버린다는 일을 배우지 못한 외로움의 아들(70쪽).

 

상당히 긴 이 대화는 장장 세 쪽에 걸쳐 이어진다. 정선생이 명준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그는 사실상 독백에 가까운 비판을 세 쪽에 걸쳐 쏟아낸다. 정선생은 42쪽에서 명준에게 묻는다.” “정치는 어때?” 세 쪽 후에 작가는 명준의 독백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44쪽)

 

흥미로운 점은 명준이 정선생이 최근 입수한 실제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본 후 바로 이 비판을 이어서 한다는 것이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 같은 퉁명스러운 상상력으로 혹은 불가코프의 <주인과 마가리타>(1967)처럼 작가는 무심한 듯 이명준을 말 그대로 죽음과 직면하게 한다. 방부처리를 한 인간의 신체보다 24세의 작가에게 더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있었을까?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64쪽)

 

명준이 인생을 알아가면서 그는 사랑을 하고 서울을 배회하고 경찰의 취조를 받고 성과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며 남한의 삶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는 월북한다. 그는 노동신문 편집부의 기자가 되고 사랑을 하고 공산당 당원에게 취조를 받고 성과 사랑에 죄책감을 느끼며 북한의 삶에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명준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으로 와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사랑을 하지만 결국 미군과 UN군의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그는 남과 북의 대표들에게 다섯 번 외친다. “중립국!” 명준은 인도인 장교와 친구가 되고 빅토리아 항구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목격하고 그리고는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감정적이고 인간적이고 정서적이며 열린 마음과 긍정적 마인드의 독자라면 그가 마지막에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주 특유의 저녁 노을은 갑자기 온 누리가 우람한 불바다에 잠겼는가 싶게 숨막혔다. (90쪽)

 

93쪽에 이르러 명준은 월북한다. 일부 원인은 성관계에 대한 죄책감이었지만 주요 원인은 새로운 광장을 찾기 위해서다. 존재하기 위한 새로운 장소로, 혁명적 열의와 인민에 대한 열정, 활발한 정치적 통일체를 꿈꾸며 또 다른 동포의 땅인 공산당 치하의 북한으로 간다……그리고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북한에는 광장이 없었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이 고장 됨됨이를 똑똑히 느끼기는, 넘어와서 바로 북조선 굵직한 도시를, 당이 시켜서 강연 걸음을 했을 때였다.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93쪽)

 

2016년 <광장>을 읽으면서 1960년에 쓰인 북한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한국이 독립한지 71년이 지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평양과 서울이 각각 소련과 미국 원조 아래 정부가 수립 된지는 68년이 지났고, 한국전쟁(1950-1953) 이후로는63년이 흘렀다. 남한의 경제가 제 3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72~1976)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지는 44년 전이다. 남한이 OECD에 가입한 때는 20년 전이다. 최인훈이 설명한 북한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남한과 북한 정부가 공언하듯이 진정 “하나의 한국”이 있다면 그리고 두 정부가 모두 한국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남한에 큰 난제를 안겨줄 것이다. 반면 둘을 비교하자면 서울이 유일하게 도덕적인 정부다.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평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남한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코울리지의 옛 알바트로스와 같이 북한의 인권 침해는 남한의 목에 걸린 멍에와 같다. 북한 국민을 압제자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옹호하는 일이 서울의 도덕적 임무다. 그럼으로써 남한 정부 스스로가 지난 수년간 가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45~1949년 혼돈의 시대가 초래한 또 하나의 결과, 즉 공산주의 중국과 민주주의 타이완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1918~1919년, 1988~1989년과 같이 한국은 중국에게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인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 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 놓는다. ‘일 등을 해도 상품은 없다’는 데야 누가 뛰려고 할까? 당이 뛰라고 하니까 뛰긴 해도 그저 그만하게 뛰는 체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살다가 으뜸 그럴듯하게 그려 낸 꿈이, 어쩌다 이런 도깨비놀음이 됐는지 아직도, 아무도 갈피를 잡지 못해서, 행여 내일 아침이면 이 멍에가 도깨비방망이로 둔갑할까 기다리면서.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었다.”(105쪽)

 

격식이라든가, 미묘한 예절의 번거로움 같은 것이, 짜증스럽고 뜻없이 보이는, 싸움터였다. 모습 없는 죽음의 그림자와 맞서서 지내야 하는 나날, 그들은 서로의 몸뚱어리에서, 불안과 안타까움을 지워 줄 힘을 더듬었다.(128쪽)

 

하지만 최인훈의 소설은 지정학 논쟁을 피하고 인간에 대해서, 전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탐구한다. 독자는 명준의 머리 속에서 그의 감정과 생을 향한 질문, 그의 욕망과 함께 한다. 결국 명준은 그 자신만의 광장인 “중립국!”을 다섯 번 외친다. 소설의 마지막은 시작처럼 중립국으로 석방 포로를 싣고 가는 배가 바다를 미끄러져가는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 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145쪽)

 

결국 명준은 실존적인 광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방에서 자유로워진다.

 

 

주석 최인훈은 1936년생으로 1960년 24세에 소설 <광장>을 문예지 <새벽>에 발표했다. 그는 <광장>으로 196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2014년 달키 아카이브 출판사는 <광장>의 영역본을 미국 일리노이 예술위원회와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출판했다. 번역은 현재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김성곤이 맡았다.

 

 

*모든 인용 페이지는 영역본 기준입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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