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2007.07.13) 글. 황석영 (출생 1943년 1월 4일)

“바리데기” (2007.07.13) 글. 황석영 (출생 1943년 1월 4일)

 

이 작품은 버림받은 공주 이야기 설화를 차용해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가며 오늘날의 난민 위기와 불법 이민자, 대도시 집중 현상 등 현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리뷰. 그레고리 C. 이브츠

2016년 9월27일

 

현실과 환상의 중간 어딘가에 전환점이 있다. 이는 일곱 세대에 걸쳐 되풀이되는 역사 중간에 있다. 한편 날아다니는 기린과 마법의 주문은 저 편에 존재한다. 언제 이러한 마술적 리얼리즘이 판타지가 되었나? 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J.K.롤링의 중간에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있다.

 

유령과 주술, 혼, 장티푸스로 죽은 아이들의 혼이 있다. 흰둥이라는 이름의 개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마녀와 도깨비와 어두컴컴한 사원이 있다. 그녀는 강아지 칠성에게, 귀머거리 벙어리 언니에게 텔레파시로 말한다. 그녀는 죽은 친척들과 이야기하고 저 세상의 그들을 본다. 그녀는 발바닥 혈 색깔만으로 고객의 건강 상태를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영혼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할머니가 말했듯이 “바리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다.

 

한국 전통설화에 버림받은 바리 공주 이야기가 있다. 바리는 아들이 없었던 오귀대왕의 마지막 자식인 일곱째 공주로 태어났다. 바리 공주는 딸이었기 때문에 태어나 버려지지만 저 세상으로 가 서천의 영약(생명수)를 구해와 새로운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이후 바리데기는 영혼을 배에 싣고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처럼 사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오구신으로 여겨진다.

 

“바리 공주” 이야기는 여정을 떠나는 여러 이야기들 중 하나다. 베르길리우스(70 B.C.-19 B.C.)는 <아이네이드>를 약 29 B.C.~ 19 B.C. 경에 썼다. 라틴의 고전인 아이네이드 이야기에서는 한 트로이 전사가 패배한 도시를 떠나 도주해 지중해를 건너 로마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보카치오(1213~1375)는 14세기 <데카메론>을 썼다. 피렌체의 고전인 이 작품에서는 도시 밖에서 흑사병이 물러나기를 기다릴 때까지10명의 등장인물이 10개의 이야기를 한다. 비슷하게 황석영은 <바리데기>를 20007년 발표했다. 이 한국 작품에서 한 여성은 무속 신앙 캐릭터로 전체주의국가의 두려움을 넘어 중국의 랴오닝과 지린에서 난민 생활의 공포를 겪고 전 세계를 돌아 런던에 도달한다.

 

바리 공주의 운명은 역사상 여러 여성의 운명과 비슷한데 이러한 여성은 고통을 겪고 “적절한 일”을 하도록 기대를 받는다. 세상의 많은 인간 바리데기들이 부모의 행동과 기대 때문에 고통을 겪었고 사회가 그들에게 자유를,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돼야 했다. 사회의 올가미에 갇혀 고통 받고 헌신하라고 용감하거나 견디라고 강요를 받는다. 바리 공주는 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데, 이야말로 가부장주의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는 바다. 바리 공주는 모든 여성의 영웅이다. 그녀는 현세의 한계를 넘어 초월적 인간이 되기 위해 희생하고 고통을 받는다. 그녀는 세상을 치유한다. 흥미롭게 개와도 소통할 수 있다.

 

불교 도입 이전 전통 설화를 바탕으로 작가 황석영은 일곱째 자식으로 태어난 작품의 여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겪는 여정을 아름다운 한 편의 잘 직조된 장편으로 완성해 독자들을 몰입시킨다. 주인공은 전체주의국가인 북한에서 억압받고 가난하고 굶주린 삶을 살다가 만주—현재 중국의 지린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항구라고 불리는 랴오닝성의 다롄으로 향한다. 그리고 대양을 건너 영국 런던으로 가, 인간으로 성장하며 온화하고 할머니와 같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의 상처를 치유한다.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본인 스스로 주술인으로서 그녀는 사람들의 병을 알아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읽어내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와준다. 동물, 이미 사망한 혹은 실종된 친척들(살았든 죽었든)과 이야기할 수 있다. 불로장생 약을 찾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그것을 찾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따롄에서 우리는 희망에 부풀었다. 아름다운 해변과 깨끗한 도심지 그리고 공원들은 또 얼마나 잘 가꾸어 놓았는지.”(5장 중반)

 

황석영이 소설의 배경으로 선택한 북한의 실상은 1970년대의 루마니아보다 심각한 수준의 참혹한 모습이다. 문학이 사회의 의식이라면 오늘날 남한은 38선 이북의 형제에게 매우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남한이 바로 이웃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이토록 오래도록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면 나는 남한의 국가 정신에 아쉬움을 표하는 바다.

 

“홍수가 넘친 들판과 시 변두리에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3장 초반)

 

황석영은 작가 커리어를 통해 북한과 남한의 관계 개선을 강력히 지지해왔다. 실제로 여러 차례 북한을 직접 방문했고 적지를 방문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그는 석방되고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다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리데기>를 썼다.

 

“배급도 끊기고 노임도 나오지 않으면서 광부들도 일을 때려치우고 식량을 구하러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방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문을 닫고 일손을 놓은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2장 후반부)

 

작품은 2007년에 발표됐지만 2015년에서야 소라 김 러셀의 번역으로 페리스코프(Periscope)에서 영역본이 출간됐다. 현재 영역본은 영국 시장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

 

소설은 주술적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리데기>는 단순히 한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부장적 사회에 저항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다. 설화를 통해, 황석영이 소설을 통해 그러했듯이, 무속신앙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남성 우월주의를 비판한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전통 설화에서나 현대 소설에서나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관련이 있다. 남성 우월주의 속에 고통 받는 대상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황석영도 전통설화도 모두 세속적 세계를 수용하지 않고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을 창조해냈다. 바리데기는 이 세상이 주는 즉각적인 보상 그 이상을 보며, 엄격한 유교주의 한국 사회에 너머에 있는 신성한 보상을 선택했다. 바리는 현모양처와 순종적인 딸을 여성 가치의 유일한 잣대로 여기는 유교주의 한국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는 여성의 롤 모델이며, 따라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바리의 여정은 지배적인 사회가 여성에게 무엇을 기대하든지 그 이상으로 여성 스스로 다른 경로와 결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리는 자신을 개발해야 하는 곳의 현실에 적응하지만 이에 압도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성성의 존엄을 인정받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설화에 등장할법한 할머니와 함께 한 신기한 능력을 지닌 아이의 인생 이야기다. 바리는 할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세계를 향해 여정을 떠난다. 개와 텔레파시로 대화하며 지구와 조화를 이루며, 바리는 영혼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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